시련의 시기는 삶의 가치를 다할 수 있는 선물.
잔잔한 물은 노련한 뱃사공을 만들지 못한다.
혹독한 경쟁상황과 열악한 환경을 이겨 냈을 때
사람도 기업도 비로소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계속 햇볕만 쬐면 사막이 되어 버리듯
인생에 성공만 있으면 자만하기 쉽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할 가슴을 갖기 힘들다.
- 이승한, 홈플러스 사장
강한 의지와 성공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강한 의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또한 고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하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은혜도 베풀어줍니다.
2009년 2월 25일 수요일
2009년 2월 23일 월요일
기도제목을 나누는 방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온유 10순의 blog가 보기 좋습니다.
올 한 해 기도를 담당했는데, 특별히 기도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방 이름은 STG (Speak to God)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Always Pray
온유 10순의 blog가 보기 좋습니다.
올 한 해 기도를 담당했는데, 특별히 기도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방 이름은 STG (Speak to God)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Always Pray
골리앗을 이기는 19가지 습관*
골리앗을 이기는 19가지 습관*
Max Lucado 지음 / 두란노
♣ 물러서지 말라
당신을 지명하여 부르신다
그렇게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다. 7번 후보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이상하다 여긴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세어본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 어라? 이새 씨, 아들이 여덟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신데렐라의 계모가 비슷한 질문을 받고 움찔했던 걸 기억하는가? 이새도 그랬다.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삼상16:11)
여기서 '말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학카톤'(haqqaton)으로,
단순한 나이의 개념을 넘어 등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가장 늦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제일 변변치 못한 형제(꼬마,꼴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시 양을 지키는 건 학카톤의 몫이었다. 모자라서 혹 사고를 일으킬지 모르니 아예 일을 만들지 못할 곳에다 내보내자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방에 양뿐인 허허벌판에서 무슨 말썽을 피울 수 있겠는가? 다윗은 양들과 함께 푸른 초장에 있었다.
장차 성경은 무려 66장에 걸쳐서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다. 예수님 말고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 59번이나 언급한다. 다윗은 장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거기 살게 될 주인공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일컬어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펜 끝에서 가장 위대한 시편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왕이며 용사이고, 음유시인이며, 거인 골리앗을 처단한 맹장으로 추앙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족 모임에 끼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신뢰 받지 못하고 잊혀진 아이, 궁벽한 촌구석에서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을 하며 지내는 꼬마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목하셨을까?
누구나 다윗의 초장을 걸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소외'라는 이름의 풀밭이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체격이 얼마나 좋은지, 피부가 무슨 색인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느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얼마나 넓고 좋은 사무실에서 일하는지,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따위를 가지고 등급을 나누려드는 사회통념 때문에 모두들 지쳐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헌신하고 희생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윗사람은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쪽보다 입 안의 혀처럼 알아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부하를 더 좋아한다.
교사는 수업 준비를 잘 해 온 아이보다 귀엽게 구는 녀석에게 먼저 눈길을 준다. 심지어 부모도 잘난 자식을 내세우고 조금 처지는 아이는 들판으로 내돌리기 일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외라는 거인이 세상을
호령할 수밖에 없다.
당신 역시 소외의 골리앗이라면 진저리가 나는가? 그렇다면 이제 놈에게서 눈을 뗄 때가 되었다. 그런 평가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정작
중요한 건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분의 생각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라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무엘상 16장 7절은 사회의 학카톤(말째)에게 주신 말씀이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들어 쓰신다.
주님은 심판을 피해 달아났던 모세를 사용하셨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지만, 결국 쓰임을 받았다. 라합은 매음굴로, 삼손은 못된 여인의 품으로 피했다. 야곱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엘리야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라는 자포자기에 빠졌고, 롯은 악한 무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모두 불러다 일꾼으로 삼으셨다.
다윗은 어땟는가? 하나님은 베들레헴 주위의 산간을 누비는 소년을 보셨다. 소년은 빛나기는커녕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양치는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하나님은 형의 목소리를 빌어 다윗을 부르셨다. "다윗아, 잠깐 집에 들어왔다 가야겠다. 어떤 어른이 널 좀 보자고 하신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호리호리한 십대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소년의 몸에 묻어 온 양 노린내 때문에 다들 코를 잡으며 눈쌀을 찌푸린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
Max Lucado 지음 / 두란노
♣ 물러서지 말라
당신을 지명하여 부르신다
그렇게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다. 7번 후보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이상하다 여긴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세어본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 어라? 이새 씨, 아들이 여덟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신데렐라의 계모가 비슷한 질문을 받고 움찔했던 걸 기억하는가? 이새도 그랬다.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삼상16:11)
여기서 '말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학카톤'(haqqaton)으로,
단순한 나이의 개념을 넘어 등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가장 늦게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제일 변변치 못한 형제(꼬마,꼴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시 양을 지키는 건 학카톤의 몫이었다. 모자라서 혹 사고를 일으킬지 모르니 아예 일을 만들지 못할 곳에다 내보내자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방에 양뿐인 허허벌판에서 무슨 말썽을 피울 수 있겠는가? 다윗은 양들과 함께 푸른 초장에 있었다.
장차 성경은 무려 66장에 걸쳐서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다. 예수님 말고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 59번이나 언급한다. 다윗은 장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거기 살게 될 주인공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일컬어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펜 끝에서 가장 위대한 시편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왕이며 용사이고, 음유시인이며, 거인 골리앗을 처단한 맹장으로 추앙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족 모임에 끼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신뢰 받지 못하고 잊혀진 아이, 궁벽한 촌구석에서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을 하며 지내는 꼬마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목하셨을까?
누구나 다윗의 초장을 걸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소외'라는 이름의 풀밭이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체격이 얼마나 좋은지, 피부가 무슨 색인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느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얼마나 넓고 좋은 사무실에서 일하는지,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따위를 가지고 등급을 나누려드는 사회통념 때문에 모두들 지쳐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헌신하고 희생해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윗사람은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쪽보다 입 안의 혀처럼 알아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부하를 더 좋아한다.
교사는 수업 준비를 잘 해 온 아이보다 귀엽게 구는 녀석에게 먼저 눈길을 준다. 심지어 부모도 잘난 자식을 내세우고 조금 처지는 아이는 들판으로 내돌리기 일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외라는 거인이 세상을
호령할 수밖에 없다.
당신 역시 소외의 골리앗이라면 진저리가 나는가? 그렇다면 이제 놈에게서 눈을 뗄 때가 되었다. 그런 평가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정작
중요한 건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분의 생각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라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무엘상 16장 7절은 사회의 학카톤(말째)에게 주신 말씀이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들어 쓰신다.
주님은 심판을 피해 달아났던 모세를 사용하셨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지만, 결국 쓰임을 받았다. 라합은 매음굴로, 삼손은 못된 여인의 품으로 피했다. 야곱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엘리야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라는 자포자기에 빠졌고, 롯은 악한 무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모두 불러다 일꾼으로 삼으셨다.
다윗은 어땟는가? 하나님은 베들레헴 주위의 산간을 누비는 소년을 보셨다. 소년은 빛나기는커녕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양치는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하나님은 형의 목소리를 빌어 다윗을 부르셨다. "다윗아, 잠깐 집에 들어왔다 가야겠다. 어떤 어른이 널 좀 보자고 하신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호리호리한 십대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소년의 몸에 묻어 온 양 노린내 때문에 다들 코를 잡으며 눈쌀을 찌푸린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
2009년 2월 7일 토요일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