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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9일 월요일
3T [이우근 광야의 묵상]
▲ 법조인들만큼 시험지옥을 톡톡히 겪어온 직업인도 드뭅니다. 각급학교의 입학시험이나 졸업시험이야 누군들 거치지 않았으랴만, 1・2・3차에 이르는 사법시험을 통과한 후에도 다시 사법연수원의 중간시험과 수료시험 등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법률가의 자격을 얻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근무할 때,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한 연수생들이 또다시 시험공부에 매달려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연수원 교수들에게 시험문제를 좀 쉽게 내주라고 당부한 적도 있었지만, 연수생들의 고생을 경감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문제가 쉽고 어렵고를 떠나 자신들의 앞길을 좌우하는 시험관문을 소홀히 여길 연수생들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법조인들의 운명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단 법조인만이 아닙니다. 어떤 일자리든 그것을 얻기 위한 테스트 test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종 공무원시험이나 의약사 醫藥師 자격시험, 석박사 碩博士 학위취득시험 등은 매우 어려운 테스트로 꼽힙니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시험을 4년 혹은 5년마다 치러내야 합니다.
웬만한 직업을 얻으려면 외국어능력 테스트 하나 정도는 거쳐야 하고, 자동차운전을 하려 해도 운전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취업이 어려워진 이즈음에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엄격한 전형과정을 두고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 종이답안지에 써내는 식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면접시험이라도 치러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나름의 테스트 과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 객관적 검증이 어려운 문화예술분야에도 테스트의 과정이 있습니다. 문단 文壇에 진출하려면 주요 언론사의 신춘문예나 문예지 文藝誌의 추천을 통과해야 하고,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가 되려는 청소년들 앞에도 실기 實技 콩쿠르나 콘테스트 contest의 난관 難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테스트를 거쳐 어떤 자격을 얻었다 해도 아직 끝이 아닙니다. 시험 뒤에는 시련 試鍊이 찾아오는 법, test를 통과하고 나면 trial을 만나게 됩니다. 업무를 배우고 익히는데도 시련이 따르지만,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가정이나 동료나 사회와 조화를 이뤄가려면 적지 않은 갈등에 부딪치기 일쑤입니다. 아니, 세상을 등지고 홀로 입산수도 入山修道하는 자리에도 시련과 역경 逆境은 어김없이 찾아듭니다.
어떤 직업이든, 일을 올곧게 처리해 나가는 데는 남모르는 고초 苦楚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속절없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시련은 한 인격을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이끄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과 실의 失意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인재 人才들이 혹독한 시련 앞에서 실패의 쓴잔을 들이키고 주저앉았습니다. 정치적 탄압, 조직의 압력, 여론의 몰매 같은 사회적 시련도 있고, 병고 病苦나 가난 같은 개인적 시련도 있습니다.
시련은 정의와 불의 不義를 가릅니다. 시련이 순교자와 배교자 背敎者를 갈라놓습니다. 시련이 독립지사와 매국노의 정체를 폭로했으며, 시련이 민주투사와 정치꾼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한 인격의 미추 美醜도 시련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재판을 영어로 trial이라고 합니다. 시련은 시험보다 더 어렵고 두려운 과정입니다.
▲ 안타까운 것은, 어려운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고 엄혹한 시련을 잘 견뎌낸 이들이 나중에 엉뚱한 유혹에 빠져 그 값진 성취들을 쓰레기더미로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시련 trial이 직접적인 장애라면, 유혹 temptation은 간접적이고 은근한 장애물입니다. 시련이 칼이라면, 유혹은 화려한 독버섯입니다. 칼 앞에서는 경계심을 품지만 향긋한 내음,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는 가슴을 풀어헤치게 됩니다.
맨손으로 수백 명의 장병을 때려눕힌 거인 삼손도 미녀 들릴라 한 여인 앞에서 실패했고, 이스라엘 최고의 임금 다윗도 아리따운 여인 밧세바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삼손과 다윗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검증 test을 당당히 통과한 사사 士師 Judge요 제왕이었으며 외적 外敵의 위협이라는 시련 trial을 물리친 위인들이었지만 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 temptation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돈은 좋은 하인도 만들고, 나쁜 주인도 만든다. Money makes a good servant, but a bad master” 경험주의철학의 비조 鼻祖요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과 ‘신기관론 新機關論 Novum Organum’ 등을 저술한 베이컨 F. Bacon의 말입니다. 베이컨은 대영제국의 귀족원 의장을 겸임하는 최고위 대법관 Lord Chancellor과 국새상서 國璽尙書 Lord Keeper of the Great Seal를 지낸 뒤에 수뢰죄 受賂罪로 수감되었습니다. 정치적 음모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은 혐의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부를 경멸하는 것은 부자가 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부자가 될 자신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끝내 공직자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야인 野人으로 죽어 그나마 철학자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 부 富와 명예, 권력과 쾌락은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강력한 유혹의 향기를 뿜어댑니다. 저잣거리의 장삼이사 張三李四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법조인, 교육자, 심지어 세속 世俗의 유혹을 초개처럼 여길 터인 문화예술인과 종교인들마저도 그 앞에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귓속말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돈’이라는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그들이 솔직하다면 말입니다. 남몰래 향락의 침상을 뒹굴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저명인사도 하나 둘이 아닙니다. “장관이 얼마나 좋은 자린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부산의 무슨 복집에선가 전직 법무부장관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라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다가 불쑥 내뱉은 소리입니다. 장관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는 몰라도, 권력과 명예가 오죽이나 좋았으면 법치국가의 법집행을 맡았던 사람이 법을 짓밟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을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계절, 새 봄입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는 터에, 저 싱싱한 젊은이들이 이제부터 어려운 시험 test으로 시작해서 모진 시련 trial을 거쳐 달콤한 유혹 temptation의 마지막 언덕까지 넘어야 하는 3T의 역경은 생각만 해도 벌써 안쓰러워집니다.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취업시험 test 준비에 여념이 없는 청년들에게 trial과 temptation을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기도 하려니와 잔인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들은 시련을 겪는 중입니다. 시험준비 자체가 곧 시련이요, test의 단계가 이미 trial의 시기인 셈입니다. 그 시련이 주는 현실적, 심리적인 상처는 자못 깊습니다. 미취업 청년들에 대한 사려 깊은 정책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여, test와 trial과 temptation의 3T 앞에 무릎 꿇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 마침내 값진 승리에 도달하기를...
사법연수원에서 근무할 때,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한 연수생들이 또다시 시험공부에 매달려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연수원 교수들에게 시험문제를 좀 쉽게 내주라고 당부한 적도 있었지만, 연수생들의 고생을 경감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문제가 쉽고 어렵고를 떠나 자신들의 앞길을 좌우하는 시험관문을 소홀히 여길 연수생들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법조인들의 운명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단 법조인만이 아닙니다. 어떤 일자리든 그것을 얻기 위한 테스트 test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종 공무원시험이나 의약사 醫藥師 자격시험, 석박사 碩博士 학위취득시험 등은 매우 어려운 테스트로 꼽힙니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시험을 4년 혹은 5년마다 치러내야 합니다.
웬만한 직업을 얻으려면 외국어능력 테스트 하나 정도는 거쳐야 하고, 자동차운전을 하려 해도 운전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취업이 어려워진 이즈음에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엄격한 전형과정을 두고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 종이답안지에 써내는 식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면접시험이라도 치러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나름의 테스트 과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 객관적 검증이 어려운 문화예술분야에도 테스트의 과정이 있습니다. 문단 文壇에 진출하려면 주요 언론사의 신춘문예나 문예지 文藝誌의 추천을 통과해야 하고,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가 되려는 청소년들 앞에도 실기 實技 콩쿠르나 콘테스트 contest의 난관 難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테스트를 거쳐 어떤 자격을 얻었다 해도 아직 끝이 아닙니다. 시험 뒤에는 시련 試鍊이 찾아오는 법, test를 통과하고 나면 trial을 만나게 됩니다. 업무를 배우고 익히는데도 시련이 따르지만,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가정이나 동료나 사회와 조화를 이뤄가려면 적지 않은 갈등에 부딪치기 일쑤입니다. 아니, 세상을 등지고 홀로 입산수도 入山修道하는 자리에도 시련과 역경 逆境은 어김없이 찾아듭니다.
어떤 직업이든, 일을 올곧게 처리해 나가는 데는 남모르는 고초 苦楚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속절없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시련은 한 인격을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이끄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과 실의 失意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인재 人才들이 혹독한 시련 앞에서 실패의 쓴잔을 들이키고 주저앉았습니다. 정치적 탄압, 조직의 압력, 여론의 몰매 같은 사회적 시련도 있고, 병고 病苦나 가난 같은 개인적 시련도 있습니다.
시련은 정의와 불의 不義를 가릅니다. 시련이 순교자와 배교자 背敎者를 갈라놓습니다. 시련이 독립지사와 매국노의 정체를 폭로했으며, 시련이 민주투사와 정치꾼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한 인격의 미추 美醜도 시련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재판을 영어로 trial이라고 합니다. 시련은 시험보다 더 어렵고 두려운 과정입니다.
▲ 안타까운 것은, 어려운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고 엄혹한 시련을 잘 견뎌낸 이들이 나중에 엉뚱한 유혹에 빠져 그 값진 성취들을 쓰레기더미로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시련 trial이 직접적인 장애라면, 유혹 temptation은 간접적이고 은근한 장애물입니다. 시련이 칼이라면, 유혹은 화려한 독버섯입니다. 칼 앞에서는 경계심을 품지만 향긋한 내음, 아름다운 모습 앞에서는 가슴을 풀어헤치게 됩니다.
맨손으로 수백 명의 장병을 때려눕힌 거인 삼손도 미녀 들릴라 한 여인 앞에서 실패했고, 이스라엘 최고의 임금 다윗도 아리따운 여인 밧세바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삼손과 다윗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검증 test을 당당히 통과한 사사 士師 Judge요 제왕이었으며 외적 外敵의 위협이라는 시련 trial을 물리친 위인들이었지만 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 temptation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돈은 좋은 하인도 만들고, 나쁜 주인도 만든다. Money makes a good servant, but a bad master” 경험주의철학의 비조 鼻祖요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과 ‘신기관론 新機關論 Novum Organum’ 등을 저술한 베이컨 F. Bacon의 말입니다. 베이컨은 대영제국의 귀족원 의장을 겸임하는 최고위 대법관 Lord Chancellor과 국새상서 國璽尙書 Lord Keeper of the Great Seal를 지낸 뒤에 수뢰죄 受賂罪로 수감되었습니다. 정치적 음모라는 설도 있으나, 본인은 혐의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부를 경멸하는 것은 부자가 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부자가 될 자신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끝내 공직자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야인 野人으로 죽어 그나마 철학자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 부 富와 명예, 권력과 쾌락은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강력한 유혹의 향기를 뿜어댑니다. 저잣거리의 장삼이사 張三李四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법조인, 교육자, 심지어 세속 世俗의 유혹을 초개처럼 여길 터인 문화예술인과 종교인들마저도 그 앞에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귓속말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돈’이라는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그들이 솔직하다면 말입니다. 남몰래 향락의 침상을 뒹굴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저명인사도 하나 둘이 아닙니다. “장관이 얼마나 좋은 자린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부산의 무슨 복집에선가 전직 법무부장관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라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다가 불쑥 내뱉은 소리입니다. 장관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는 몰라도, 권력과 명예가 오죽이나 좋았으면 법치국가의 법집행을 맡았던 사람이 법을 짓밟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을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계절, 새 봄입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는 터에, 저 싱싱한 젊은이들이 이제부터 어려운 시험 test으로 시작해서 모진 시련 trial을 거쳐 달콤한 유혹 temptation의 마지막 언덕까지 넘어야 하는 3T의 역경은 생각만 해도 벌써 안쓰러워집니다.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취업시험 test 준비에 여념이 없는 청년들에게 trial과 temptation을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기도 하려니와 잔인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들은 시련을 겪는 중입니다. 시험준비 자체가 곧 시련이요, test의 단계가 이미 trial의 시기인 셈입니다. 그 시련이 주는 현실적, 심리적인 상처는 자못 깊습니다. 미취업 청년들에 대한 사려 깊은 정책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여, test와 trial과 temptation의 3T 앞에 무릎 꿇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 마침내 값진 승리에 도달하기를...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2009년 6월 7일 일요일
<베드로전서 1:3 - 1:12> 은혜의 교리(2부)
희랍어에서는 이 절들이 길고도 조심스럽게 감사의 단락을 구성하면서 한데 모여 있다. 긍휼(3절)은 은혜(10절)와 동의어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면 자주 하나님의 긍휼을 망각한다. 그의 놀라운 은혜를 묵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가 우러나며 다시금 하나님을 한가운데로 모시게 된다. 베드로는 선지자들을 가리키며 이 단락을 매듭 짓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사역이, 가끔은 불확실하긴 해도, 구약성경 안에 지시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쏟고 있고, 이는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 아주 뛰어난 희망, 주 앞에서의 기쁨 그리고 기업에 관한 주제는 모두 구약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신앙 깊은 유대인들은 언제나 큰 놀라움 중에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신(17:8) 그리고 다시 모세에게 하신(신 15:4) 그 땅의 기업에 관한 언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그 백성은 흩어질, ‘소멸하고’ ‘사라지는’ 유업으로 보였다. 그리고 구약 기자들은, ‘기업’이란 말이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주와 친히 함께 있는 상태에 적용되어지는 바와 같은 그러한 진리를 예측했다(참조, 예컨대, 시 73:25-28 과 16:5-11은 시편 기자들이 바라보는 그 기업이 큰 기쁨 가운데 끝을 맺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성경에서 예견된 구원의 소망(5//절)이 미래적이며 멸망하지 아니할 ‘하늘에서의’ 삶이 될 것을 계시하였다. //것이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보호받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이므로 아직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 전체이며 완성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생긴 구원이다(3,11절).
베드로는 그 독자들에게, 그들이 시험받고 있을 때와 그들의 기업에 관한 소망이 고난의 억누름 아래서 사라지고 있을 때 하나님만은 미더우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이 위대한 진리들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그를 사랑하는 것(8절)만이 모든 상황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신앙 깊은 유대인들은 언제나 큰 놀라움 중에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신(17:8) 그리고 다시 모세에게 하신(신 15:4) 그 땅의 기업에 관한 언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그 백성은 흩어질, ‘소멸하고’ ‘사라지는’ 유업으로 보였다. 그리고 구약 기자들은, ‘기업’이란 말이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주와 친히 함께 있는 상태에 적용되어지는 바와 같은 그러한 진리를 예측했다(참조, 예컨대, 시 73:25-28 과 16:5-11은 시편 기자들이 바라보는 그 기업이 큰 기쁨 가운데 끝을 맺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성경에서 예견된 구원의 소망(5//절)이 미래적이며 멸망하지 아니할 ‘하늘에서의’ 삶이 될 것을 계시하였다. //것이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보호받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이므로 아직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 전체이며 완성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생긴 구원이다(3,11절).
베드로는 그 독자들에게, 그들이 시험받고 있을 때와 그들의 기업에 관한 소망이 고난의 억누름 아래서 사라지고 있을 때 하나님만은 미더우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이 위대한 진리들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그를 사랑하는 것(8절)만이 모든 상황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베드로전서 1:1 - 1:2> 은혜의 교리(1부)
이 서신의 처음 구절에 관한 주석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신앙 교리들이 그 속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과 목적 또는 목표와 관계된다. 성부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가득하셔서(2,3,10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중생(신생)을 가져오셨고 웅장한 기업을 위해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는(4,5절) 분으로 그의 선지자라도 이제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에게 계시된 이 메시지의 놀라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10-12절). 우리는 천사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2절:‘디아스포라(Diaspora)'나 흩어져 있음(Dispersion)' 이란 말은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서 살고 있는 유대 민족을 표현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타락의 결과로 고대 근동 세계 도처에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연관되어 처음 사용되었다(참조, 예컨대, 사 11:12). 그래서 베드로가 편지 쓰고 있는 자들 대부분 회심한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그렇든지 아니든지간에 ’흩어져 있음‘이나 ’나그네‘라는 단어는 아마도 자신의 참 고향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자에게 대하여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다(참조, 17절; 2:11; 창 23 ; 4; 시 39:12). 이 생의 덧없음이란 동일한 생각이, 예컨대 에베소서 2:19과 히브리서 11:13에서 발견된다. 베드로는 일부러 바울 서신에서 발견되는 바 교회가 실상 참 이스라엘이라는 생각 위에서 서신을 전개하고 있다(갈 6:16; 롬 9:6-8 ; 빌 3:31). 이 생각은 2:4-12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따라서 다른 고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이 서신 전반에 흐르고 있지만 시작은 여기 2절에서 하고 있다. 신약에서 일반적인 사실인 선택은, 이것이 없이는 ‘세상의 나그네’(NIV)로서 아무런 안전 보장이 없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전적으로 적극적인 교리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이 일에 함께 사역하고 계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라는 이 부름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따로 떼어놓으시는) 성부의 목적을 수행하고 계신다(15절과 비교).
‘순종’도 이 서신에서 뚜렷한 주제이다. 22절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복음 자체에 순복하는 순종, 혹은 그것에 대한 수납을 지지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필연적인 관계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피뿌림’이란 말은 하나님의 그 백성과의 새 언약-우리가 순종하지 않았을 때 죄사함을 가져다 주는 언약-의 수립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6-8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거기에 보면 모세가 중재한 그 언약도 피로서 체결되었고 그 백성은 죽게 순종을 맹세했다.
1-2절:‘디아스포라(Diaspora)'나 흩어져 있음(Dispersion)' 이란 말은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서 살고 있는 유대 민족을 표현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타락의 결과로 고대 근동 세계 도처에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연관되어 처음 사용되었다(참조, 예컨대, 사 11:12). 그래서 베드로가 편지 쓰고 있는 자들 대부분 회심한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그렇든지 아니든지간에 ’흩어져 있음‘이나 ’나그네‘라는 단어는 아마도 자신의 참 고향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자에게 대하여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다(참조, 17절; 2:11; 창 23 ; 4; 시 39:12). 이 생의 덧없음이란 동일한 생각이, 예컨대 에베소서 2:19과 히브리서 11:13에서 발견된다. 베드로는 일부러 바울 서신에서 발견되는 바 교회가 실상 참 이스라엘이라는 생각 위에서 서신을 전개하고 있다(갈 6:16; 롬 9:6-8 ; 빌 3:31). 이 생각은 2:4-12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따라서 다른 고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이 서신 전반에 흐르고 있지만 시작은 여기 2절에서 하고 있다. 신약에서 일반적인 사실인 선택은, 이것이 없이는 ‘세상의 나그네’(NIV)로서 아무런 안전 보장이 없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전적으로 적극적인 교리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이 일에 함께 사역하고 계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라는 이 부름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따로 떼어놓으시는) 성부의 목적을 수행하고 계신다(15절과 비교).
‘순종’도 이 서신에서 뚜렷한 주제이다. 22절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복음 자체에 순복하는 순종, 혹은 그것에 대한 수납을 지지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필연적인 관계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피뿌림’이란 말은 하나님의 그 백성과의 새 언약-우리가 순종하지 않았을 때 죄사함을 가져다 주는 언약-의 수립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24:6-8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거기에 보면 모세가 중재한 그 언약도 피로서 체결되었고 그 백성은 죽게 순종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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