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31일 화요일

2009년 3월 28일 토요일

2009년 3월 25일 수요일

2009년 3월 19일 목요일

<마가복음 4:1 - 4:9> 유명한 비유 한 가지

마가는 이 장의 대부분을 예수님의 통상적인 교육 방법이었던 비유들(34절)을 몇 가지 소개하는 데에 할애한다. 대부분의 군중들은 비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스스로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해주신 설명을 듣는 특혜를 누리는데, 본문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도 당시의 구중들의 입장에 서서 9절까지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파악하려고 노력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비유는 길이와 복잡성에 있어서 거의 격언에 가까운 ‘의원’(2:17)의 비유와, 비사(比辭)에 가까운 탕자의 비유(눅15:11-32) 중간쯤 된다. 그렇지만 이 비유의 각 항목이 각각 어떤 뚜렷한 상(像)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그 세부적인 묘사들 전체가 한 가지 사상을 전하기 위한 단순한 배경이 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비유는 그 두 가지 방식을 다 취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하게 여러 가지 양식의 예화들이 나온다. 오늘날 설교에 자주 쓰이는 ‘예화들’도 같은 부류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들으라-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두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께서는 청중들에게 듣고 보라고 하신다. “씨뿌리는 자를 보라.” 아마 그곳에서 보이는 언덕에서 한 사람이 실제로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 같다. 비유들이란 원래 모든 사라들이 친숙히 알고 잇는 사물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 법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소재들과 그 외적인 의미에 잇어서 만큼은 청중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정확히 알았다. 비록 시대가 바뀌면서 그 중 어떤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말이다(예를 들면, 이 비유에서는 씨를 먼저 뿌린 다음에 밭을 일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밭의 어떤 부분이 좋은 땅인지는 추수할 때나 되어서야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또한 ‘들으라’고 하신다. 비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속뜻은 땅의 여러 가지 상태와 관계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대부분의 씨앗들과 괒ㄴ계될 수 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자라난 씨앗에서 거둔 많은 양의 수확과 관계될 수 도 있다-왜냐하면 비유는 듣는 사람의 주목을 끌기 위해 상당한 과장법을 쓰긱도 하는데, 이 비유에서는 백배의 결실이 그것에 해당되기 대문이다(백배의 결실이리가 하면 그냔 100%가 아니라 10,000%나 된다!).

2009년 3월 18일 수요일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정결한 마음 주시 옵소서



'경영의 신'이 말하는 3가지 성공요인

역경지수(AQ)를 높여라

경영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자신의 성공요인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3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하는 사이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서 항상 운동에 힘써 왔기 때문에 늙어서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열심히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훌륭한 리더는 실패와 역경을 먹고 자라납니다.

산악인 딕 베스는 "인간은 쉬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경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역경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듭니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실패와 역경은 신이 내린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약이 몸에 쓰듯이 역경은 잠시 몸에 괴롭고 마음에 쓰지만 그것을 참고 잘 다스리면 많은 이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습니다. 사업을 꾸려가다 보면 호황도 있고 불황도 있습니다.

깊은 침체의 골을 잘 이겨내는 기업은 호황기에 그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진정 위대한 리더가 되고 싶다면 실패와 역경을 피해가야 할 장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선물로 적극 환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온실 속 화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업이나 경영자, 그리고 종업원 모두 역경지수 (AQ : Adversity Quotient)를 높게 키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2009년 3월 4일 수요일

불편하게 삽시다 - 송민호 목사


이동휘목사님께서 집회로 오셨을 때, 나온지 얼마 안되는 책 한 권을 주고 가셨다. 제목은 <불편하게 삽시다. 선교하며 삽시다>인데, 이번에 새순교회 선교집회인도를 위해서 호주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책의 내용은 쉽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히 도전이 되는 글들이다. 이 책에 나오는 글들은 그 동안 목사님이 바울선교회지나 교회지에 쓰신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 같다. 대단한 도전이 되기에 일부분을 소개한다.

바울선교회와 안디옥교회는 살과 뼈의 관계이다. 떼어 놓으면 공멸한다. 바울 선교회 재정의 절반 이상을 안디옥교회가 책임지고 있다. 처음 출발도 안디옥교회에서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다. 200여명의 선교사와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전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안디옥교회를 발전시키자. 주인 노릇하면 안된다. 그러나 주인의식은 가져야 한다. ‘우리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불편하게 삽시다,’ ‘우리 교회는 기도 없으면 파산하는 교회가 됩니다,’ 라고 외쳤다. 안디옥 교회와 일생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주님의 몸인 안디옥교회를 사랑함은 최선의 의무이다. 안디옥교회에 뼈 묻을 각오를 하라. 크리스머스 선물, 주일학교 시상식, 봉사자에 대한 일체의 사례가 없는 교회이다. 보상은 없어도 순수하게 일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주님께 충성하도록 부름받았다. 지난해에 몸살 날 지경까지 충성한 그 보상은 하늘에서 받을 것이다. 또 다시 2002년을 선물 받았다. 방관자의 길목에 서지 말고 충성의 대열에 바짝 다가서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모든 성도 가정 가정마다 영원토록 풍성하시기 바란다. 할렐루야! (이동휘, 불편하게 삽시다, 128쪽)

선교를 위해서 불편을 정상으로 여기고 지금까지 달려온 이동휘목사님은 한 마디로 대단한 분이다. 설교하실 때에는 조용조용하신데, 막상 책에서는 예리한 사령관의 음성으로 글을 쓰셨다. 이목사님도 대단하시지만, 목사님의 리더십을 따라 아무런 불평없이 깡통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예산의 70퍼센트까지 선교와 구제를 위해 믿음으로 집행해온 전주안디옥교회 교인들도 보통 대단한 분들이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에어 캐나다 보잉 777 비행기는 토론토를 떠난지 22시간만에 지구 반바퀴를 돌아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의 첫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35년전에 이민왔던 밴쿠버를 연상케한다. 물론, 바쁜 곳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조용하다고 말을 할 것이다. 여기저기 푸른 잔디와 시퍼런 하늘이 따뜻함으로 반겨주고 있다. 바로 하루 전에는 눈에 쌓인 토론토에서 몸을 떨고 있었는데, 어느새 몸이 풀렸다. 한 마디로 혼동 상태이다. 이번에 새순교회가 나를 초청한 것은 우리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소수민족 선교에 대한 관심 때문인 것 같다. 새순교회 교인들은 아랍 민족과 캄보디아 민족 등 이곳 시드니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 이민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교회와 좋은 관계가 될 것이다. 서로의 노하우를 나누며 격려해 주면 참 좋겠다. 소수민족선교를 직접 담당하시는 정헌범 목사님도 함께 오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운 생각을 해본다. 먼 거리에서 온 만큼, 최선을 다해 성령님의 인도 아래 새순교회를 격려하고 축복해 드리고 싶다.

2009년 3월 3일 화요일

<누가복음 10:25 - 10:28> 사랑의 계명

율법사의 질문에는 그의 의도가 담겨 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개인 신앙에 관심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보장해 주는 신앙에 말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공동체를 위한 신앙이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주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한 공동체의 관계를 위한 율법이었다. 이러한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순종과, 죽은 후의운명을 위한 우산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사는 자기 개인의 운명에 관해서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을 생각하게 하시고 그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비유는 그 율법사가 실상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다. 하나님과 이웃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인간 관계에서 공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모든 압제를 자신에 대한 죄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음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웃인지 그 한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각도에서 이 계명들을 말할 수 없다. 출발점에서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불쌍한 처지를 만나면서 시작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않았다. 다른 경우라면출발점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회개와 자비의 문제가 출발점이다. 출발점은 그 사람의 상황에 놓여 있으며, 사랑의 성격이나 하나님의 방침에 달려 있지 않다. 율법사의 출발점은 자신의 영생에 대한 관심이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출발점을 가리키신다. 즉, 신앙이란 관계성의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며, 실제적인 생활 과정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여리고로 가는 길에 구급차 대기소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하고 고속도로 순찰대를 두는 것도 포함한다. 할세이(A. H. Halsey)는 이렇게 지적한다: “도시 위생시설 설비는 전후( ) 계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정치권에서 벌인 도덕운동들보다 더 많은 생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해주었다.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선순위가 매겨지지 않는다. 그 둘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로 시작할 수 있지만, 마칠 때는 언제나 두 가지로 마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