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9일 목요일

<마가복음 4:1 - 4:9> 유명한 비유 한 가지

마가는 이 장의 대부분을 예수님의 통상적인 교육 방법이었던 비유들(34절)을 몇 가지 소개하는 데에 할애한다. 대부분의 군중들은 비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스스로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해주신 설명을 듣는 특혜를 누리는데, 본문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도 당시의 구중들의 입장에 서서 9절까지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파악하려고 노력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비유는 길이와 복잡성에 있어서 거의 격언에 가까운 ‘의원’(2:17)의 비유와, 비사(比辭)에 가까운 탕자의 비유(눅15:11-32) 중간쯤 된다. 그렇지만 이 비유의 각 항목이 각각 어떤 뚜렷한 상(像)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그 세부적인 묘사들 전체가 한 가지 사상을 전하기 위한 단순한 배경이 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비유는 그 두 가지 방식을 다 취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하게 여러 가지 양식의 예화들이 나온다. 오늘날 설교에 자주 쓰이는 ‘예화들’도 같은 부류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들으라-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두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께서는 청중들에게 듣고 보라고 하신다. “씨뿌리는 자를 보라.” 아마 그곳에서 보이는 언덕에서 한 사람이 실제로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 같다. 비유들이란 원래 모든 사라들이 친숙히 알고 잇는 사물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 법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소재들과 그 외적인 의미에 잇어서 만큼은 청중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정확히 알았다. 비록 시대가 바뀌면서 그 중 어떤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말이다(예를 들면, 이 비유에서는 씨를 먼저 뿌린 다음에 밭을 일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밭의 어떤 부분이 좋은 땅인지는 추수할 때나 되어서야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또한 ‘들으라’고 하신다. 비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속뜻은 땅의 여러 가지 상태와 관계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대부분의 씨앗들과 괒ㄴ계될 수 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자라난 씨앗에서 거둔 많은 양의 수확과 관계될 수 도 있다-왜냐하면 비유는 듣는 사람의 주목을 끌기 위해 상당한 과장법을 쓰긱도 하는데, 이 비유에서는 백배의 결실이 그것에 해당되기 대문이다(백배의 결실이리가 하면 그냔 100%가 아니라 10,000%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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