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3일 화요일

<누가복음 10:25 - 10:28> 사랑의 계명

율법사의 질문에는 그의 의도가 담겨 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개인 신앙에 관심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보장해 주는 신앙에 말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공동체를 위한 신앙이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주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한 공동체의 관계를 위한 율법이었다. 이러한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순종과, 죽은 후의운명을 위한 우산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사는 자기 개인의 운명에 관해서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을 생각하게 하시고 그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비유는 그 율법사가 실상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다. 하나님과 이웃은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인간 관계에서 공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모든 압제를 자신에 대한 죄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음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웃인지 그 한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각도에서 이 계명들을 말할 수 없다. 출발점에서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불쌍한 처지를 만나면서 시작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않았다. 다른 경우라면출발점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일 수도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회개와 자비의 문제가 출발점이다. 출발점은 그 사람의 상황에 놓여 있으며, 사랑의 성격이나 하나님의 방침에 달려 있지 않다. 율법사의 출발점은 자신의 영생에 대한 관심이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출발점을 가리키신다. 즉, 신앙이란 관계성의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며, 실제적인 생활 과정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여리고로 가는 길에 구급차 대기소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하고 고속도로 순찰대를 두는 것도 포함한다. 할세이(A. H. Halsey)는 이렇게 지적한다: “도시 위생시설 설비는 전후( ) 계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정치권에서 벌인 도덕운동들보다 더 많은 생활의 기회를 공평하게 해주었다.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선순위가 매겨지지 않는다. 그 둘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로 시작할 수 있지만, 마칠 때는 언제나 두 가지로 마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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